표지 작업은 소담(@tea_sd)님이 도와주셨습니다.
나는 밤 11시 20분 강릉행 막차 티켓을 끊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면 부산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바다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서울보다는 조용한 곳에 가고 싶었다. 시끄러웠던 터미널은 밤이 되자 승차장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아저씨의 재채기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강릉 막차- 강릉 막차- 승차 하세요- 혹여나 마지막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건지 버스기사 아저씨가 크게 소리쳤다. 버스에는 나를 포함해 다섯 사람이 올라탔다. 중년의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서로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빈 좌석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나는 그들이 앉은 곳에서 조금 더 뒤쪽인 창가자리에 앉았다. 고속버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크게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다. 버스는 톨게이트를 지나 순조롭게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창밖은 암흑으로 변했다. 버스 옆을 지나는 달리는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들을 보다가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보통 고속버스를 타면 위성 TV를 틀어놓는데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 건지 내가 탄 버스는 특이하게 TV대신 라디오 소리가 버스 안을 채웠다. 버스에 흘러나오는 심야 라디오는 디제이의 멘트보다 노래가 더 많이 나왔지만 거의 다 내가 모르는 팝송뿐이었다. 하지만 휴대폰도 엠피쓰리도 없는 나의 무료함을 달래줄 것은 작게 흘러나오는 라디오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앞에 앉은 아저씨의 코고는 소리가 들릴 때 즈음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청가람. 이름 외에 아무 내용도 써져 있지 않고 손자국만 꾸깃하게 나있는 종이었지만 나는 이 종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것은 나의 ‘유서(遺書)’이다.
하드보일드 로맨스
w.쟌이
■ 새벽 두시에 도착한 강릉은 너무나 한적해 택시조차 잡기 힘들었다. 겨울 추위에 벌벌 떨며 겨우 잡은 택시에 올라탄 나는 경포대로 가달라고 말했다. 처음 와보는 강릉에 내가 아는 건 경포대 하나뿐이었다. 경포대요? 새벽 늦게 경포대에 가달라고 말하는 내가 이상한지 택시 기사가 한 번 더 내게 물었다.
“바다 가시려고요?”
“…….”
“사실 바다는 경포해변이라고 해요. 경포대는 바다가 아니고 호수 앞에 있는 누각이거든요.”
손님 없는 새벽에 나를 태운 것이 반가웠는지 택시기사가 관심 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놓는다. 나는 딱히 대답 없이 택시기사의 얘기만 조용히 들어줬다. 내가 끝내 아무 말도 없자 택시기사도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나는 새벽의 바다에 도착했다. 무작정 온 바다는 생각과 달리 무척 매서웠다. 철썩철썩- 큰소리를 내며 치는 파도는 해변의 모래를 깎아내고 있었고, 모처럼 달이 환히 뜬 밤이었지만 바다는 어디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맸다. 너와 함께 이 밤바다를 걷고 싶다고 누군가 노래했었지. 하지만 그런 감성 넘치는 노래와 달리 밤바다는 나를 집어 삼킬 정도로 어두웠고 매서웠다. 바다를 보러 온 것이 아님에도 나는 파도가 치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찬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몇 분을 멍하니 서있었을까. 누군가 내 팔을 뒤로 세게 잡아 당겨 끌었다. 놀란 나는 그대로 모래사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나를 잡아 끈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였다. 남자는 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내게 큰소리를 쳤다.
“지금 위험하게 뭐 하는 거예요?!”
“……?”
“지금 죽고 싶어요?!”
“아.”
정신을 차려보니 옷 절반이 바닷물에 젖어 흥건한 상태였다. 나도 모르게 덮쳐오는 파도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큰일 날 뻔 한 일임에도 내가 큰 동요를 하지 않자, 나를 바다에서 건져낸 남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죽으려고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그럼 미쳤어요?”
나는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냥 한낱 해프닝으로 생각하고 갈 길 가줬으면 좋겠건만. 남자는 나를 살린 것을 이유삼아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집은 근처예요? 옷 빨리 안 갈아입으면 몸살 걸릴 텐데.”
“아니, 저는….”
“따라와요. 바로 앞이 저희 집이니까.”
이제 그만 신경을 꺼뒀으면 좋겠는데 남자는 기어이 나를 끌고 자신의 집으로 앞장섰다. 남자의 집은 정말 바다 앞에 있었는데 1, 2층이 횟집인 건물 맨 위층에 있는 주택이었다. 본의 아니게 처음 보는 사람의 집까지 따라 들어온 내가 현관에 어색하게 서 있자 남자가 수건과 티셔츠 한 장을 던져주었다. 일단 호의에는 인사를 해야 할 거 같아서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 새벽에 혼자 바다에서 뭐한 거예요. 정말 죽으려고….”
“아니에요.”
“…….”
“정말 아니에요.”
죽으려고 했냐는 남자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아직 죽을 자신이 없었다. 나의 대답에 남자는 그제야 잔뜩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서 나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나는 대충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아 내고 남자를 쳐다 보았다. 아까는 어두운 곳에 있어 몰랐는데 지금 보니 꽤 괜찮은 얼굴의 매력적인 남자였다.
“청가람이에요.”
“전 주은찬이라 해요.”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미소에 홀리듯 남자의 손을 잡았다.가벼운 통성명을 제외하고는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남자는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와는 다르게 유쾌했고 정이 많았다. 물론 나는 그 점이 불편하긴 했지만. 계획 없이 무턱대고 오게 되어 옷 하나 없던 나는 그렇게 이곳에 있는 동안 남자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나를 단순한 가출한 소년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는 남자가 썩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오늘 처음 본 나를 믿고 집에 들인 것이 신기하기도, 기가 차기도 해서 집에 머물라는 제안을 받아드렸다.
남자의 부모님은 이혼하여 각자 새살림을 차렸고 남자는 혼자 이 집에서 생활한다고 말했다. 자기소개인지 아닌지 모를 그 얘기를 나는 대충 한 귀로 흘려보냈다. 자신의 얘기를 끝낸 남자는 나 역시 무언가 말하길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남자처럼 무거운 얘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능력 같은 건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얘기들은 어차피 들어봤자 서로에게 좋을 거 하나 없는 얘기뿐이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남자는 더 이상 묻디 않고 그저 빙긋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잘 부탁해요.”
그렇게 나는 서울에서 도망치듯 오게 된 곳에서 주은찬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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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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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 너 때문에 죽었다며? 우리 엄마가 그랬었어.”
“…….”
초등학생 때였나. 그런 소문이 돌았었다. 청가람은 어미를 죽인 아이니까 청가람과 놀면 죽는다는. 어린 애들은 어리기 때문에 더 잔인하고 영악하다. 그래서 나는 어리기 때문에 더욱 더 잔인하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아니라고 부정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때 내가 진짜 저주 받은 아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 후로는 일부러 ‘인간관계’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다. 나와 엮이면 너는 불행해 질 거야. 나는 저주 받았으니까. 날이 갈수록 나의 대한 자기혐오는 커졌고 아버지가 나를 짓밟은 그 날, 나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은찬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오고 나서야 지갑하나 안 가져 온 것을 깨달았다. 안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까 했지만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꼴도 웃길 것 같아 그냥 정처 없이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바닷바람이 굉장히 거셌다.
“하하….”
짭조름한 바다냄새 가득한 찬바람을 맞다가 갑자기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아, 누가 바다를 상처 받은 영혼들의 안식처라고 했는가. 이곳에 있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바다는 그렇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다는 한없이 매서우며 자비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처량했고 가여웠다. 바로 나처럼.
“한심하다. 진짜.”
주은찬은 나를 그저 갈 곳 없는 호의를 베풀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지는 고작 일주일 남짓. 그 기간 동안 둘이 한 것이라곤 시내가지에 나가 옷을 사고 내용도 잘 기억 안 나는 영화를 본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짧은 새에 주은찬의 목소리로 말해주는 내 이름이 좋아졌으며 나를 괴물처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아이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아, 나는 정말로 저주 받은 것이 분명하다. 결국 나는 주은찬이 나를 좋아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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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에 시간 돼? 주말에는 출근하지 않는 주은찬이 모처럼 느지막하게 일어나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뭐라고? TV를 보고 있던 나는 리모컨을 들고 볼륨을 조금 줄인 후 다시 물었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서 나가는데,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잖아. 어때? 얘들은 괜찮다는데.”
“…….”
“아, 맞다. 몸 안 좋으면 무리 안 해도 돼.”
“갈래.”
다행히 그리 심한 몸살은 아니었는지 주은찬이 사다 놓은 약을 먹은 후 자고 일어나니 나아졌다. 그래도 주은찬은 걱정이 되는지 나한테 몇 번이고 괜찮겠냐고 물었다. 어차피 주말에 홀로 집에 남아있어 봤자 하루 종일 영양가 없는 예능 프로그램 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핑계이고. 주은찬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조금 무리를 해 가겠다고 한 것이다. 나는 주은찬과 달리 사람들 무리에 함께 자연스럽게 섞이는 법을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 정도로 나는 지금 주은찬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술집 안에는 살짝 이른 저녁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은찬을 따라 술자리에 오게 된 나는 주은찬 옆에 엉거주춤 앉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술집 안에 튼 꽤 큰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떠들썩함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괜히 속이 울렁거려 연거푸 물만 들이마셨다.
“와, 그럼 청춘? 힐링여행? 뭐 그런 거네요?”
주은찬의 고등학교 친구들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목적 없이 무작정 버스표를 끊고 동해바다에 온 나를 뭔가 대단하게 보는 듯하였다. 요즘 여기저기서 떠드는 청춘, 힐링과 거리가 먼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어만 보였다. 역시 무리해서 온 자리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술집도 처음 왔을 뿐더러 술을 많이 마셔보지 못 했던 나는 쓰고 독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목으로 넘기는 척을 하느라 곤욕이었다.
“그나저나 주은찬 너도 참 대단하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을 막 집에 재워?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아, 가람씨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야 오글거리게 가람씨가 뭐냐. 동갑이라며? 그럼 친구지 뭐.”
내 의사 같은 건 물을 생각도 없는지 그들끼리 내 이름을 부르며 낄낄거린다. 나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주은찬이 흘끗 내 눈치를 살피며 미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어쨌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마셔야지? 자, 모두 잔 채워.”
힘들면 말해. 소주로 가득 찬 잔을 보며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주은찬이 작게 속삭였다. 쓰디 쓴 소주가 목을 타고 넘어간다. 몇 번을 경험한다 해도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쓴맛이다.
“오, 가람이 잔이 비었네?”
주은찬은 힘들면 말하라고 했지만 나는 괜히 오기가 생겨 주은찬의 친구놈들이 따라주는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술집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눈을 떴을 때는 주은찬의 집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지금이 몇 시인지도 가늠할 수도 없었다. 아직 창밖이 어두운 것 보니 새벽인 것 같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는 주은찬 등의 업혀서 들어왔던 것 같다. 주은찬에게 괜히 못난 꼴을 보인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마 아직 몸살기운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익숙지도 않은 소주를 연거푸 들이마셔 기절한 것이 분명하다.
“아…. 속 안 좋아.”
나는 울렁거리는 속과 깨질 것 같은 머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갔다. 거실은 어두웠고 주은찬은 방에서 자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우욱.”
변기를 부여잡고 구역질을 하자 토사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세면대에 물을 틀어 입을 헹궜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나는 뭔가 찝찝한 기분에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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