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SD ::




::ZAN:: .

 

옛날 옛날 한 옛날에
w. 쟌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호랑이가 곰방대를 물고 곶감 소리에 놀라 꽁지 빠지게 도망가던 시절. 저어기 깊은 하얀 산 속에 아주 사나운 범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범의 덩치는 아주 태백산맥만 하고 성질은 흉포하기가 그지없었지만 다른 범들과는 다르게 가죽이 눈이 부실정도의 백색의 아름다운 털가죽을 지녔더래. 때문에 범의 털가죽을 노린 전국의 소문난 사냥꾼들이 모여 범을 잡으려고 노력했는데 모두 범에게 상처를 입히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만 죽어갔대. 사람들이 범의 성질을 건들 때 마다 마을 하나를 통으로 잡아먹히는 건 일도 아니었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뒤늦게 백색의 범을 신(神)으로 모시며 지금도 언제 백색 범신이 언제 노할지 몰라 바들바들 떨고 살고 있대’

 

 

 “태백산맥만한 호랑이가 말이 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백색 가죽은 또 어떻고.”
 “가람 너는 의심이 너무 많아.”
 “미령 네가 너무 멍청해서 그래. 그나저나 냄새가 나지 않아?”
 “냄새? 킁킁. 무슨 냄새 말야?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한탕 할 냄새.”
어째 넌 돈 밖에 생각 못 하니? 가람이라고 불린 소년의 말에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예쁘장한 소녀 미령이 입을 삐죽이며 대답한다. 어깨를 으쓱이며 미령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가람이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령 앞을 앞서 걸어간다. 그렇게 한 참 산길을 걷던 중, 앞서 걷던 가람이 갑자기 멈추어 선다. 왜? 뒤따라오던 미령이 묻자 가람이 킁킁 소리를 내며 공기 중 냄새를 맡는다. 물 냄새가 가득한 거 보니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어느덧 해도 뉘엿뉘엿 지는 중이었고 하늘은 갑자기 몰려든 먹구름 때문에 스산해졌다. 비가 올 거 같아. 가람이 멈춘 걸음을 다시 빨리한다. 산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마을이 보일 것이다. 방금 미령이 해준 백색 호랑이를 신으로 모신다는 그 마을이다. 걷는 와중에 가람은 주머니 속 남은 노잣돈을 확인했다. 미령이 돈 타령만 한다고 한소리 하긴 했으나 확실히 지금 쯤 밥벌이를 해놓아야 앞으로의 여행길이 순탄할 것이다. 백색 호랑이 가죽은 값이 얼마나 나갈까나. 가람이 입가를 삐죽 올리고 웃으며 걸음이 느린 미령을 재촉했다.
 “어서 범 잡으러 가자.”


* * *


  생각보다 비가 빨리 쏟아지는 바람에 가람과 미령은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물에 빠진 생쥐마냥 쫄딱 젖고 말았다. 비는 소나기였는지 마을에 도착하자 금방 그쳤지만 젖은 옷과 몸이 무척 찝찝했다. 미령은 폭삭 젖은 저고리 치마에 벌써 인상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가람은 일단 몸을 말릴 수 있고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주가(酒家)부터 찾았다. 옷이야 내버려 두면 금방 마를 테지만 계속해서 찡찡거릴 미령을 볼 자신도 없었고, 백색 호랑이의 얘기를 들으려면 역시 여러 얘기가 오가는 주가를 찾는 것이 딱 이었다. 주가는 마을 입구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방 하나를 빌린 가람은 일단 찡찡거리는 미령을 방에 밀어 넣고 마당으로 나왔다.
 “아줌마, 여기 국밥 하나요.”
가람의 주문에 주모가 퉁명스런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선 아직 솜털도 가셔 보이지 않은 가람이 혼자서 국밥을 시키는 모습이 영 의심스러운지 주모가 가람의 봇짐을 슬쩍 훔쳐본다. 그 속내를 눈치 챈 가람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금전 하나를 꺼내 주모에게 던지고 다시 한 번 말을 했다.
 “국밥 하나.”
 “아, 예. 예. 국밥 하나 곧 나갑니다-!”
가람은 돈을 받고서야 방긋 웃으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주모의 뒷모습을 보며 쯧쯧 하고 작게 혀를 차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저쪽 구석 상에서 거나하게 취한 중년 사내가 서넛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가람은 주모가 먼저 내온 술떡을 크게 한입 베어 물며 슬금슬금 그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훔쳐 들었다.
 “향이 고 계집이 어찌 앙탈을 부리는지! 내 그 년 토라진 걸 풀어주느라 한 시진이나 걸렸잖아!”
 “크핫핫 자네 성격에 꽤나 고생 좀 했겠어?”
 “그래도 고년은 그럴 때 빼고는 평소엔 피부도, 속도 야들야들 해가지고-”
 “크흠- 흠.”
술기운에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사내들은 한창 계집 얘기 중이었다. 괜시리 민망해진 가람이 헛기침 소리로 기척을 알리자 놀란 사내들이 가람을 쳐다보고서 크게 소리친다.
 “네 놈은 뭐냐?!”
 “실례지만 잠시 말 좀 물을까 합니다.”
 “마을에서 못 보던 놈인데 타지 사람인가 보군!”
 “이 마을에 하얀 가죽의 호랑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예끼! 이 놈!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데 누굴 찾아?!”
가람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사내 중 한 명이 꿀밤을 주는 시늉을 하며 가람을 나무란다.
 “너도 어디서 소문만 듣고 범신님의 하얀 가죽 좀 구경하고자 하고 온 것 같은데 그러다가 죽은 놈들이 한 둘이 아니야! 네 놈도 소리 소문 없이 죽고 싶지 않다면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말거라.”
 “…….”
말도 제대로 하기 전에 어린 애 취급당하며 졸지에 꾸짖음만 듣게 된 가람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할 수만 있다면 눈앞에 사내들을 한 번에 잡아 메치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기에 가람은 애써 욱하는 제 성질을 꾹꾹 눌러 참았다. 그 때 주가 구석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요 위 설(雪)산 위로 50 리 정도 오르면 범신의 거처가 보이지.”
 “아이고, 저 영감탱이! 언제부터 거 있던 게요? 놀랐잖소.”
언제부터 있었는지 구석에는 백발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가람조차 노인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 했기에 갑작스런 노인의 등장에 모두가 깜짝 놀라 버렸다.
 “설산 말입니까.”
 “그래, 백색 가죽의 범이 나타나고 언제부턴가 산의 모든 잎사귀들이 백색으로 변했지. 그 후 그 모습이 산 위에 눈을 뿌린 것 같아 설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네.”
 “…….”
가람이 몸을 일으켜 마을 위에 자리 잡힌 크고 하얀 산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줄로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노인의 말처럼 산 자체가 하얬다. 가람을 진지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기(氣)가 심상치 않군. 댁은 귀인인가?”
 “아닙니다.”
 “흐음.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신도 아니고 요상한 기야.”
노인의 말에 가람은 그저 방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내일 아침 동이 트자마자 설산에 오를 것이다. 주모가 아까 시켰던 국밥을 들고 나왔지만 가람은 묘한 흥분감에 허기가지지 않았다. 일단 주모에게 부탁해 나온 국밥은 취한 사내들에게 안주로 넘겼다. 노인이 가람을 붙잡고 의아하게 쳐다보자 가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요상한 것이 당연하죠. 인간도 귀신도 아닌 하늘의 사신. 청룡이니깐요.”
가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청룡임을 밝히자 노인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뜬다. 가람은 그저 방긋 웃어만 보인 후 미령이 잠들어 있을 방으로 유유자적 걸어갔다.
  다음 날 가람과 미령은 동이 트자마자 주가에서 나와 설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상쾌한 새벽의 산 공기를 물씬 지니고 있는 것은 다른 산들과 다르지 않았으나 노인의 말대로 설산의 모든 잎들은 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기이해 빨빨 거리며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던 미령이 결국 얼마 안 가 제 풀에 지쳐 힘들어 한다. 가람이 그런 미령을 봐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한참 앞서 걷자 뒤에서 따라오던 미령이 헥헥 거리며 가람을 부른다.
 “가람. 나 너무 힘들어.”
 “…….”
 “나 힘들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여 내가 널 업어갈 거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우씨. 하얀 호랑이는 갑자기 왜 잡자는 거야 진짜! 애초에 진작 하늘나라에 갔으면 내 꼬리도 만들어 주고 너도 불로장생으로 부귀를 누릴 수 있는….”
 “내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가람이 엄청난 살기를 꺼내 놓는 바람에 미령은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했다. 히끅. 좀처럼 보기 드문 가람의 살기에 놀란 미령이 꼬리 여덟 개를 꺼내 놓은 지도 모르고 딸꾹질을 한다. 무섭게 살기를 띄운 가람은 덜덜 떠는 미령을 달래지도 않고 그대로 산을 올랐다.


* * *


  가람은 꽤나 험한 설산을 한 시진이나 꼬박 걸었다. 미령은 삐친 건지 아니면 화를 내는 자신에게 겁먹은 건지 더 이상 가람의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가람은 오히려 귀찮았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미령은 가람이 청룡 가문에 반항을 하고 무작정 가출 후 역마 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 만난 여우요괴였다. 인간의 남자와 정을 나누고 백일 동안 정체를 들키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구미호와는 다르게 미령은 꼬리가 여덟 개인 팔미호였는데, 그 탓에 백년을 묵은 여우임에도 완전하지 못 한 어린소녀의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미령은 우연히 마주친 가람이 사신 후계자인 청룡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혹여 가람이 자신에게 꼬리 하나를 달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람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귀찮았지만 여행길이 혼자인 것보다 누군가 함께 하는 편이 더 나았기에 가람도 미령에게 딱히 무어라 하지 않은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지금은 자신에게 말실수를 한 미령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호랑이 굴은 어디 있는 거야. 산세가 워낙 험해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네.”
길눈이 그리 밝지 않은 탓에 호랑이는 못 찾아도 호랑이굴은 해가 지기 전에 찾으려고 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해 노을이 새빨갛게 하늘을 덮고 있었다. 노을빛을 받은 하얀 설산의 잎사귀들이 빨갛게 물드는 정경에 길 찾는 것도 잊고 감탄을 하던 가람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결국 가람은 해가 지기 전에 호랑이굴을 찾지 못하였다. 산 속의 밤은 일찍 찾아왔고, 해가 진 밤중의 산은 한 치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설산은 하얀 잎들이 달빛을 반사시켜 어둠 보다는 은은한 빛을 만들어 내어 은쟁반을 비춘 것 마냥 산길을 비춰 주었다. 반짝이는 산 속의 하얀 풀들을 보던 가람은 이것이 백색 호랑이의 기운 때문이라면 가히 범신(神)이라 불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설산의 아름다움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계속 같은 공간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령을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가람은 자신의 아픈 구석을 건드는 미령에게 순간 살기를 뿜으며 화를 낸 것이 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일단 이 이상 산 속을 헤매는 것보다 날이 밝고 다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밤의 설산이 환하다곤 해도 계속해서 산행을 하기엔 피로했기 때문이다. 가람이 그나마 자리가 평평한 곳을 골라 등에 맨 봇짐을 내던진 후 자리에 누워 그것을 베개 삼아 누웠다. 그렇게 가람이 달빛을 이불 삼아 살짝 잠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공기를 타고 심상치 않은 기(氣)가 느껴졌다. 이상한 기운을 느낀 가람이 눈을 뜨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혹 백색의 호랑이인가 싶어 잔뜩 주위를 경계하며 여의주도 꺼내는 순간 갑작스런 돌풍이 불어 와 가람의 시야를 방해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껄껄걸. 청룡의 여의주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구나!”
 “…낮에 그 할아버지?!”
여의주로 바람을 걷어내고 상대를 확인한 가람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말았다. 이상한 기운의 주인은 낮에 주가에서 자신에게 백색의 범이 거처하는 곳을 알려준 노인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인자했던 노인과 지금의 노인은 뭔가 달라 보였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노인에게서 음기(陰氣)가 물씬 느껴져 나왔다.
 “네놈 정체가 뭐냐!”
 “사신의 심장을 탕에 고아 먹으면 인간은 불로장생의 몸으로 천하를 누릴 수 있고 귀신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소리를 들어봤느냐?”
 “오호. 그럼 넌 인간이 아닌가 보구나.”
노인에게 느껴지는 음기에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노인은 인간이 아닌 귀신인 듯싶었다. 네 심장을 다오. 노인의 모습을 한 귀신은 껄껄 웃으며 가람의 심장을 주름이 가득한 자신의 손으로 가리킨다.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귀신의 행동에 가람은 그저 여유 있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집 나간 청룡을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나도 백색 호랑이 대신 다 늙어빠진 귀신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뭐잇-?! 네 놈이 산채로 심장을 뜯겨 봐야…. 우욱.”
가람의 도발에 손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노인의 배에 번개가 반짝하더니 순식간에 여의주의 창이 귀신의 심장에 박혀들었다.
 “어디 한낱 잡귀가.”
귀신인지라 피 한 방울 남지도 않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귀신을 보며 가람이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노인의 모습을 한 잡귀가 사라지고 나니 다시 적막만이 하얀 산을 휘감았다. 가람은 여의주를 다시 집어넣고 찌뿌둥한 팔을 한 번 풀어준 후 다시 누웠던 자리에 가 앉았다. 잠시지만 한바탕 하고 나니 잠이 모두 달아나버렸다. 삐친 미령은 마을로 내려간 걸까. 돈도 없을 텐데. 그제야 뒤늦게 미령의 걱정이 든 가람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산을 내려갈 채비를 할 때였다. 뭔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가람의 앞에 기와집만한 커다란 백색의 범이 서있었다.
 “버, 범신…!”
생각지도 못한 백색 범과의 조우에 가람은 당황해서 여의주를 꺼내는 것도 순간 까먹고 잠시나마 자리에 얼어붙었다. 가람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여의주를 꺼냈을 때, 순간적으로 공중에서 범의 눈동자와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

크와아아앙-

허억. 산을 단번에 집어 삼킬만한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람이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금방 여유를 되찾은 가람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문대로 기백이 아주 남다르구나! 백색의 털도 무척 아름답고. 팔면 꽤 받겠는 걸?”
 “크흐으”
설산 잎사귀들의 반사된 빛을 받은 범의 털가죽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가람은 여의주의 창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범을 가리키며 입가를 삐죽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놈이 범신(神)대접 받는 것도 오늘 뿐이다.”


* * *


  먼저 마을로 내려온 미령은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으며 새벽 늦게까지 오지 않는 가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람이 하늘나라 얘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얘기를 꺼낸 것은 자신이 잘못했지만, 가람이 그렇게까지 살기를 띄울 줄은 몰랐다. 좀처럼 보기 힘든 가람의 모습에 겁을 먹은 나머지 차마 계속 산을 오르지 못 하고 마을로 내려왔는데 해가 지고도 가람이 나타날 생각을 안 하자 미령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까 전에는 짐승 울음소리 비슷한 게 들렸던 것 같기도 해 더 걱정이 되었다.
 “호랑이 잡으러 간다더니, 잡아먹힌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걱정하긴.”
 “으앗! 깜짝이야!”
갑자기 가람이 미령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쿡 찌르면서 나타났다. 놀란 미령이 표정을 정리하고 힐끗 가람의 눈치를 본다. 다행히 화가 풀린 건지 가람이 아까의 살기는 없고 대신 조금 피곤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런데 호랑이는 잡고 온 거야? 왜 빈손이야?”
 “그냥 왔어.”
 “왜? 그렇게 호랑이 잡자고 노래 부르더니”
 “…….”
 “응?”
 “호랑이가… 호랑이가 아닌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몰라, 피곤하다. 방은 잡아 놨겠지? 가서 난 자야겠다. 미령이 가람에게 들러붙어 무슨 소리냐고 물어봤지만 가람은 모르는 척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미령의 궁금하다는 눈빛이 뒤통수에 마구 꽂혔지만 가람은 피곤한 몸을 이불에 뉘이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눈을 감으면 설산에서 마주친 범신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앞에서 그려져 잠이 오지 않았다.

「네 놈이 신(神)대접 받는 것도 오늘 뿐이다.」
「크흐으-」

그 때 가람은 범이 달려오면 금방이라도 공격할 생각으로 자세를 취했지만 백색의 범은 이빨만 들어내며 울 뿐, 가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람을 탐색이라도 하는 모양새로 범은 흰색 털과 대비되는 샛노란 눈으로 가람을 응시했다. 그런 범의 태도에 가람은 의아했지만 호랑이를 잡겠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

가람이 먼저 여의주의 창을 들고 범에게 달려들 때 가람은 범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느꼈다. 귀신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닌 심상치 않은 기운에 가람은 범에게 달려들던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백색의 털만 가진 그저 특이한 동물인줄 알았더니 범의 기운은 평범한 짐승의 기운이 아니었다.
 ‘설마 영물(靈物)인가….’
결국 가람이 먼저 여의주를 집어넣었다. 아무리 사신의 후계자인 자신이더라도 하늘나라에서 관리하는 영적 존재인 영물을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람이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자 범 역시 드러내던 이를 감추고 노란 눈으로 가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가람은 그렇게 한참을 자신을 바라보는 범의 눈빛을 받으며 자리에 서있었다. 짐승인 듯, 짐승이 아닌 것 같은 진득한 눈빛을 견디지 못한 가람은 도망치듯 설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오늘은 자기 글렀네.”
가람이 눈을 뜨고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옆자리를 보니 언제 자신의 옆에 누웠는지 미령이 이불을 끌어다 잠들어 있었다. 가람은 살짝 웃으며 미령의 이불도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누워 한 번 더 잠을 청했다. 그러나 가람은 하루 종일 산행을 한데다, 잡귀와의 조우에 거기다 백색의 호랑이까지 만나 정말 피곤한데도 도저히 잠에 들지 못했다. 몇 번을 더 뒤척이던 가람이 휴우. 하고 한숨을 쉬어 보인다. 눈을 감으면 그 이상야릇했던 하얀 짐승의 눈빛이 계속해서 생각이나 가람은 결국 잠을 설치고 말았다.


* * *


  가람은 원래 잠버릇이 험하고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늘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고역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어제 새벽 늦게 돌아와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심지어 항상 가람보다 일찍 일어나던 미령은 아직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고롱고롱 코를 골며 아직도 잠들어있었다. 가람은 미령이 깨지 않게끔 조용히 까치발까지 해 몰래 방을 나온 후 아침 산행에 춥지 않게끔 옷깃을 한 번 더 여미었다. 그리고 설산을 향해 걸었다. 아무래도 백색의 호랑이 신이 정말 영물인지 아니면 한낱 짐승인지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분명 여기 즈음이었는데.”
가람은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어 길을 잃지 않게끔 다시 설산을 올랐다. 그러나 어제 자신이 산을 탄 흔적은 보였지만 호랑이 발자국은커녕 그 흔한 고라니의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몸집이 큰 짐승이라 분명 흔적이 남아있을 텐데, 호랑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보았던 백색 호랑이의 흔적이 그 짧은 간밤에 이렇게 사라지니 자신이 꿈을 꾼 게 아닐까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새벽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가람이 포기하고 다시 산을 내려가려는데 뭔가 묘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뭐지, 또 잡귀인가? 아니면 범신?!’
어젯밤 잡귀를 만난 전적이 있는 가람이 바짝 주위를 경계하며 여의주를 꺼내었다. 그러나 가람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잡귀도, 범신의 호랑이도 아니었다.
 “설산은 어린 애가 혼자 다니기엔 위험한 산일 텐데 말이야.”
 “뭐?!”
어디서 나타난 건지 자신의 앞엔 자신보다 몇 뼘은 더 클 듯 보이는 사내가 서있었다. 도깨비처럼 나타난 큰 키의 사내는 무척이나 준수한 외모였지만 꽤 매서운 눈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가람은 초면에 어린애 취급 받아 울컥해 갑자기 사내가 어디서 나타났는지에 대한 문제는 신경도 못 쓰고 한껏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쪽은 누군데 위험한 산을 막 혼자 다니는데?!”
 “흐음.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
“…혹 길을 잃은 사람이면 얼른 마을로 내려가쇼. 여기에 백색 호랑이가 산다니까”
 “뭐? 길을 잃어?”
하하하하. 가람의 말에 사내가 마구 웃어재낀다. 가람은 저를 어린애 취급하는 사내가 기분 나빴지만 헛소리를 하는 남자를 제 딴에 걱정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말에 갑자기 마구 웃는 남자를 보고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미친 사람인가….’
애써 사내를 무시한 가람이 쯧쯧 혀를 차고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공중에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어라…. 노란 눈?’
매섭다고 생각했던 사내의 눈동자는 샛노랬다. 순간 사내의 눈과 어젯밤 마주친 호랑이의 눈이 겹쳐 보이자 가람이 걷던 발걸음을 주춤했다. 둘 다 노란 눈이었지만 호랑이의 눈빛은 기묘했다면 사내의 눈빛은 어딘가 야릇했다. 사내는 샛노란 눈을 반짝이며 가람이 민망해 먼저 고개를 돌릴 때까지 가람을 쳐다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냐”
 “내 이름 알아서 뭐 하게?!”
 “난 백건.”
다짜고짜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가람은 백건이라고 하는 사내를 모른 척 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백건이 갑자기 자신의 팔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으앗. 하고 놀랜 소리를 내버렸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아기 분내가 나는군.”
 “무슨 헛소리야?!”
 “너 여기에서 분 냄새가 난다고.”
 “뭐, 뭐하는 거야!”
갑자기 백건이 잡았던 가람의 팔을 놓치지 않고 자신 쪽으로 당기더니 가람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다. 백건의 행동에 놀란 가람이 잡힌 백건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잡히지 않은 남은 한쪽 손으로 백건을 저지해봤으나 백건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그 손도 붙잡히는 불상사를 만들어버렸다. 가람의 양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은 백건이 연신 가람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냄새를 맡는다. 그러더니 백건의 얼굴이 갑자기 가슴팍 쪽으로 내려가 가람의 가슴 쪽에 얼굴을 묻는다. 가람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제부터 좀 꼴리긴 했지.”
 “대, 대체 무슨 소릴…. 으앗.”
힘이라면 자신 있던 가람이었지만 백건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힘으로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백건의 악력에 가람의 저고리 앞섬이 다 풀어 헤쳐져버렸다.
 “이름, 정말 안 가르쳐 줄 거야? 기분 좋게 해줄게.”
 “가람…. 청가람. 알려 줬으니까, 이것 좀 놔.”
 “계집애 같은 이름이군.”
 “뭐?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가람이 발끈하며 잡힌 손을 빼내려 한 번 더 노력했지만 백건은 쉽게 나주지 않았다. 보통 사람과 달리 좀처럼 보기 힘든 기와 힘이다. 다시 한 번 가람의 눈이 백건과 마주치자 백건의 눈빛이 사납게 변한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짐승처럼…. 자, 잠깐. 짐승?
 “설마 백색의…호랑이?!”
 “잘도 날 찾아다니더군. 너도 내 백색 털을 노리고 왔냐.”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
 “난 지금 널 잡아먹을 거야.”
씨익 웃으며 말하는 백건의 모습에 가람의 팔뚝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금방이라도 백건이 호랑이로 변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자신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

 

 

둥차 건가람 첫 책으로 냈던 원고입니다. 역시 부분공개

-
◀◀   1 2 3 4 5   ▶▶
♔             이왕막그린곰